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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칼럼

[칼럼]김주원과 길라임의 수준 차이? - '시크릿 가든' 속 미술관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시크릿가든이 드디어 종영됐다. 드라마가 시작하고 난 후 시크릿가든 속의 모든 것이 유행이 되고 최고의 화두가 되어왔다. 드라마 20회 동안 다양한 명장면들이 있었겠지만 필자가 가장 많이 곱씹었던 장면은 17회에 등장했던 장면이다.

길라임은 윤슬을 데리고 피카소와 모던아트 전을 보러간다. 그리고 어떤 난해한 작품 앞에서 이런 걸 보고 어떤 걸 느껴야 하는지 윤슬에게 묻는다. 이건, 김주원과 비슷한 사회지도층으로 대변되는 인물 중 하나인 윤슬에게 묻는다. 이 작품 앞에서 길라임은 다시금 김주원과의 신분격차를 느낀 것이다.

길라임과 김주원으로 대표되는 평범한 소시민과 교양과 미적, 지적 수준이 높은 사회지도층의 괴리는 미술관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으로 이는 김주원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술 전시회에 오면 시간낭비를 안 해도 되거든요. 걸음걸이 보면 성품 나오고 그림 보는 안목 보면 교양수준 보이고 미술관에 어울릴 사람인지 클럽에 어울릴 사람인지 향수 취향이 노골적인 우회적인지 답이 빠르니까.


이처럼 길라임과 김주원의 대사를 종합적으로 보면 삼신할미 랜덤 잘 타서 부모 잘 만나 세상 편하게 살며 미학수업을 들은 김주원과 윤슬과 같은 사람만이 높은 교양 수준을 가지고 저런 그림을 봐도 척척 어떤 그림입니다,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마지막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일단, 그림의 정체부터 파헤쳐보자.



 





이 작품들은 피카소의 것이다. 피카소는 전쟁의 참상을 알린 <게르니카>의 작가이자,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애인들(?)의 초상화를 자주 남겼다. 그 여인들은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두 명 이상의 여인들을 소유하길 원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관계는 복잡해져갔다. 후에 그 여인들은 피카소에게 버려지게 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왼쪽부터 올가 코글로바, 마리 테레즈 발터, 도라 마르의 초상화이다.

초상화? 인물을 그린 초상화라고 하기엔 점차 사람이 형이상학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나마 왼쪽에 있는 초상화가 르네상스의 고전적 여성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만약 나에게 나의 초상화를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초상화처럼 저렇게 그려준다면 난...기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진’ 않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에서는 첫 번째 그림처럼 아카데미적 형식을 깬 점에서 그의 천재적인 발상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정통적인 회화법을 통달하였다. 더 이상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흔해빠진 기법은 그에게 흥미거리가 아니었다. 피카소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싫증이 나면 하나하나 해체하는 것처럼 사물을 해체해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 옆에서 바라보는 모습 등을 한 화폭에 나타냈다.

피카소가 유명한 화가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피카소의 이러한 화풍을 마뜩찮게 여기고 항상 피카소에게 그림을 제대로 그리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끝끝내 아버지는 위대한 자신의 아들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길라임과 윤슬이 바라보던 난해한 작품 역시, 피카소가 사랑한 젊은 예술가 프랑소와 질로의 초상이다. 제목은 ‘초록색 모자를 쓴 여인’으로 1947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그림으로 92x73cm의 크기이다.

이 둘은 1943년 프랑스와 질로(22)의 첫 번째 전시회때 피카소(62)를 초대했을 때 만났는데 이후 1947년, 프랑소와 질로와 함께 프랑스 남부 골프 쥐앙에 정착한다. 저 사진에서 젊은 프랑스와 질로와 늙은 피카소의 사랑이 느껴지는가?


프랑스와 질로는 화가로도 유명하였으며 1953년 피카소의 여성편력을 견디다 못해 그를 차버리고 16년 후 1696년 세균학자 조나스 썰크를 만나게 되고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유일하게 피카소를 먼저 차버린 여성이 된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입체적이지 않아 평면적이지만 명암은 느낄 수 있다. 왼쪽 위에서 빛이 들어오는 듯하지만, 이것도 불분명하다. 그리고 검은 색 윤곽선을 넣은 것은 더욱 평면적이게 다가 왔다.

‘피카소의 모던아트’전의 책자를 인용하면,

이 그림에서 프랑소와 질로는 거의 동물적인 강인한 인상을 가지고 있고 두 눈의 크기 또한 다른 크기로 묘사되었다. 한쪽 눈은 묘하게도 모자에 가려있고 눈 주위는 마치 고양이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고양이’라고 필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 저 모습이 고양이라면 좀 더 생동감 넘치거나,유연하거나, 고양이스러운 교태가 흘러나와야하지 않았을까 싶다. 필자의 생각과 일치한 부분은 아래 인용구다.

‘이런 나이 어린 여인을 앞에 두고 피카소는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델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정, 무관심은 전체적인 색감이 회색, 초록, 황토색 등으로 사랑이 충만한 분홍색, 노란색등의 밝은 느낌이 아니란 점에서 다들 공감할 거 같다. 그리고 저 그림은 질로가 임신할 때 그려진 그림이라 하였는데, 여인의 풍만함과 만족스러움보다는 피카소만의 ‘나 이렇게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라는 느낌만 든다.

프랑소와 질로의 초상은 한 작품 더 있는데 왼쪽의 그림은 앙리 마티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과 열등감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프랑소와 질로의 모습은 더욱 단순해지고 더욱 원색은 강렬해졌다.

앙드레 브르통이 지적한 것처럼 피카소는 여인을 주제가 아닌 대상으로만 다루고 있다. 그에게 여인이란 방 안에 있는 물리적 구조에 불과했다. 피카소의 여인들이란, 피카소에게 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변형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피카소와 프랑소와 질로의 사랑이, 피카소에게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변형의 대상일 뿐이었을까?





포스팅을 하다 우연히 한 작품을 더 찾게 되었다. 바로 이 그림, 저 위의 그림보다 훨씬
우아하고 풍만하며 교태스럽기까지 하다. 머릿결은 자유분방하며, 손에 턱을 괸 여인의 입은 다물려있지만 무슨 말을 건넬 것만 같다


비록 이 둘의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진 않았지만 10년 넘게 그 둘은 서로 사랑하였다. 40살이라는 어마어마한 나이 격차를 뚫은 그 사랑은 그 둘의 육체적 교감이 아닌 정신적 교감이라 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동경과 배려라는 사랑. 따라서 단지 사물에 불과했다는 단정적인 해설만으로는 둘의 사랑을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것은 길라임과 김주원으로 대표되는 두 사람의 신분격차가 4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쉽지 않을까?





길라임이 이 작품을 보고 어떻게 느껴야 하냐고 물었을 때, 필자도 이 작품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할지 몰랐다. 그냥 어두운 피카소의 그림이네? 정도? 정말 그가 사랑한 여인의 초상화일 줄 꿈에도 몰랐다.

‘모던아트’는 옛날 르네상스나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회화와 달리 ‘그림을 읽어내고 공부해야’만 한다.

이처럼 어려운 영문기사를 읽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 선플도 악플도 못다는 것처럼.- 뭘 알아야, 해석을 해야 선플도 달고 악플도 다는 게 아닌가? 교양수준이란, 그림을 잘 보고 못 보고가 아니라, ‘얼마나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는가!’ 이다.

12살 때부터 미학수업을 들은 김주원이 삼신할미의 랜덤복이 있긴 했지만 우리처럼 유산을 두고 형제끼리 싸울 일 없는 길라임과 같은 우리들도 교양수준, 미적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길라임이 가난해서 교양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미술’이란 ‘스턴트우먼’에게 불필요한 요소처럼 느껴졌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녀도, 우리도 조금만 더 먹고 사는 것과 학점, 수능 등의 문제에서 벗어나서 미술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 더 공부를 한다면 미술관이 백화점 VVIP 라운지처럼 상위 1프로 VVIP만 즐기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된다. 그런 미학수업은 ‘네이버’에서도, ‘다음’에서도, ‘학교 도서관’에서도 언제나 어디서나 할 수 있으니까.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미술은 사치스러운 예술이 아니다. 미술을 알아간다는 것은, 한 작품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 작가 ‘한 사람’의 인생과 사상을 알아가는 것과 똑같다. 마치 ‘무릎팍도사’라는 토크쇼에 등장하는 유명 연예인, 스포츠선수, 문학가, 예술가 등의 삶을 듣는 것처럼. 아님 그것보다 더 위대한 삶을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초록색 모자를 쓴 여인이라는 작품이 들려주는. 피카소가 들려주고 있는 40년 나이 차이를 극복한 사랑이야기처럼.

마지막으로 시크릿가든이 두 사람의 신분격차를 극복해내고 초록색 모자를 쓴 여인에 얽힌 러브스토리와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 사이트: (http://kkrjsw.blog.me/110039471735)





[written by 라 프리마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