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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아기/칼럼

[칼럼]막장 드라마는 비난받아 마땅한가? -통속 예술과 예술성

한국 취업 신문 협력 기사(주소미정)





우리는 드라마를 볼 때 '막장'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막장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사용하며 비슷한 의미로 '아침 드라마'라는 말도 애용된다. 아침 드라마란 원래는 아침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뜻했지만 아침 드라마와 막장 드라마의 '어떤' 속성의 일치로 현재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모두 복잡한 혈연관계나 연애문제 등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구성으로 개연성이 떨어지는, 혹은 자극적인 장면, 비약적인 설정이 빈번하게 이용되는 드라마를 뜻한다.

이들은 말도 안 되고 자극적이어서 예술이라 보기 힘들고 자라나는 어린이나 청소년의 가치관 성립에 유해할 수 있으며 국민적 정서와 상반되고 외국인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저해시켜 대한민국의 국격 하락, 한류열풍이 줄어들어 각종 국가 산업 등에 어쩌고 저쩌고……. 하여튼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저속하다.

이상한 점은 다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또 막장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것이다. 막장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과 채널은 이상하게 시청자가 모여든다. 저속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즐기나보다.

저속할지라도 대중이 좋아하는 예술 갈래에는 원래 '막장'이라는 광산업 전문용어보다 '통속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막장 드라마나 아침 드라마는 일종의 통속 드라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드라마 뿐 아니라 어떤 장르든 스스로를 고결함이라 포장하는 모든 예술에는 평가 잣대로 '통속성'이라는 기준이 존재한다. 주로 해당 예술의 가치를 폄하하는 용도로 이용된다. 반대로 고결한 예술은 이것이 진짜 예술에 가깝다는 의미로 '예술성'이라는 단어를 애용한다. 통속성은 예술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예술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요소이며 예술성은 예술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긍정적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통속적인 것은 왜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고 정말 그것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일까? 통속적은 정말 나쁠까? 그렇다면 예술적인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일까? 

통속성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려면 우선은 반대 의미인 예술적인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예술성에 대한 정의는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많은 논의가 있다. 하지만 의미 있는 범위 내에서의 예술성은 '아름다움을 어떤 형식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지가 관건이다.

아름다움은 '인간 내적인 쾌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인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우리가 어디서 쾌감을 느끼는지는 개인의 성향 차이에 달린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 

대중적 인기가 많은 예술을 예술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술 드라마보다 막장 드라마가 인기가 더 많으니 막장 드라마가 예술성이 더 높다고 말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예술성의 의미는 사전에 나오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딱 정의를 내리긴 힘들지만 판단 기준은 알 수 있다. 바로 '평론가가 좋아하는 예술'인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미적 판단의 주체는 평론가다. 사전적 정의가 '모든 개인'을, 즉. '우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만든 기준이지만 이렇게 보니 왠지 기분이 확 상한다. 왜 소수 집단이 판단이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사회에는 항상 계급이 존재했던 것처럼, 법적으로는 계급이 사라진 현대에도 마음 속으로 계급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 위에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귀족'이다. 어떤 판단에 있어서의 주체가 되는 계급이다.

문화의 판단주체인 '문화 귀족' 계급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바로 평론가다. 그들은 문화 귀족 중에서도 그 구심점이자 표본 역할을 하는 계층이다. 기성 세대의 예술을 사랑하고 고전을 숭배한다. 그들의 기호에 맞는 예술은 '표준 예술'이고 '우리 나라에서 교양 있는 사람 들이 두루 보는 현대 서울 예술'이 된다. '나 자신'이 기준이어야 할 미의식이 타인의 판단에 맞춰 재단된다.

만약 이런 기준이 영원불멸하고 절대적인 것이라면 까짓거 인정해 주고 우리가 여기에 맞춰 줄 수 있다. 그러나 미의 기준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대가 변했고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양식이 변했고 유행이 변했다. 지금의 기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바뀔 것이고 대신 다른 기준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영화 감독 중 김기덕이나 홍상수, 박찬욱은 평론가가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 문턱 높다는 칸 영화제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든다. 이들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끝났다.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평론가가 좋아하신 분들이니까. 그러나 이들 세 감독의 최고 흥행작의 관객 수를 다 합쳐도 여기저기서 잘 까이고 다니는 해운대 관객 수에 못미친다. 그마저도 박찬욱을 빼면 비교할 가치도 없다. 홍상수는 있으나마나다.

시대는 결국 대중의 선택을 따라간다. 새로 도래할 시대에는 김기덕, 홍상수, 박찬욱보다는 윤재균 감독이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물론 그 때에도 박쥐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빈집이 명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먼 과거에나 인정받던 작품을 아직도 칭송하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예술성을 인정받는 모든 작품이 과거에도 인정받던 것은 아니고 마찬가지로 지금 인정받지 못하는 작품이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다.

지금의 통속 예술이 미래에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 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 작품을 현재의 기준으로 멋대로 재단하여 쓰레기와 명작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기성 세대가 요구하는 예술성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보다는 시대 흐름에 영합했다는 이유가 더 비난받을 사유로 적절해 보인다.

통속 예술이 돈을 벌기 위한 예술이라 불순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말은 바로 하자. 돈이 먼저가 아니라 대중이 먼저인 것이다. 대중의 공감을 얻으려 예술을 하면 돈은 따라서 생기는 것이다. 돈을 주 목적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직접 예술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 용기가 없는 자들이나 하는 비겁한 말이다.

대중 예술이 대중을 밝히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설혹 돈이 목적이었다고 한들, 우리가 무슨 수로 그걸 판단할까? 어떻게 알아냈다고 쳐도 남이 돈 좀 벌겠다는게 그렇게 배가 아플 일인가? 예술이 자선 사업인가? 그리고 사상이 불순하니 어쩌니 해도, 결정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볼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파악하고 체계화하고 집약하는 데 성공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흥행 공식이라 하는 것이고 일종의 형식미로 볼 수 있다. 시조가 고려 말기부터 근대에까지 널리 불리워진 것도 형식적 체계를 잡은 것과 관련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도 영화의 공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것이나 양산형 판타지 소설, 저질 인터넷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최근의 통속 예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의 통속 예술은 말초적 감각의 흥분제일 뿐 참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믿는다.

이럴 때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밖에 없다. 시대 흐름에 따른 현상이니 시대의 흐름을 비난해 보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비난에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비운의 회의주의자, 찌질이가 되고 많다.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방법은 비난 대신 당신이 가진 새로운 미의 기준으로 기존의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좋아하게끔 그들을 유도하고 설득하고 교화시키면 된다. 개인의 노력으로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게 느껴지지만 여태까지의 모든 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이뤄져 왔기에 불가능하지 않다.

기존의 예술에 질린 사람이 한 사람 있다면 같은 이유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딘가 또 있을 것이다. 비겁하게 모니터 뒤에서 비난하기보다는 당당하게 수면 위에서 동지를 찾고 세력을 전파해 새로운 문화의 주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혹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해 패배자가 되더라도 괜찮다. 기존 세력을 견제하고 예술의 다양성을 키워나갔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존재의 이유는 있었던 것이다.




[written by colum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