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이야기/칼럼

달빛과 강물의 은밀한 만남에 대하여

달빛과 강물의 은밀한 만남에 대하여

제갈덕주/문학광장

1. 정의(Definition)의 어려움에 대하여

떠한 것을 정의한다고 할 때 ‘X는 무엇이다와 같은 형식만으로는 어려운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철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라던가 사과는 단맛이 나는 과일의 일종이다.’와 같은 방식의 속성 부여가 가능한 대상은 대개 지시적 특징이 매우 뚜렷한 경우에 속한다. 현실 속에서 형상이 뚜렷한 경우에는 그것을 쉽게 지시할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한 부가 정보들의 제공만으로도 정의가 가능하다. 반면, ‘사랑이란 어떠한 것이다.’ 또는 믿음이란 어떠한 것이다.’와 같은 경우는 그 대상이 현실 속에서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를 찾아보자면 전자는 경험적(experimental) 대상에 관한 것이며, 후자는 관념적(ideological) 대상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천지만물은 대개 이()와 기(), 질료(質料)와 형상(形像), 내용(內容)과 형식(形式), 정신과 육체,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하나의 대상이 지닌 양면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양면성이 존재의 본질 속에 실재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인간이 어떠한 대상에 대해 이해할 때 이와 같이 내외(內外)를 이원화해서 이해하려는 특성을 지닌 것은 틀림이 없다.

이때 전자(경험적 대상)는 대개 물리적인 속성이 그 원리나 의미에 비해 더 힘을 가진 부류이고, 후자(관념적 대상)는 반대로 내적인 원리나 의미가 물리적인 특징에 비해 힘을 가지는 부류이다. 우리는 대개 전자를 구체명사(具體名詞), 후자를 추상명사(抽象名詞)라고 부른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변증법적 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는 사상가들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이란 것이 칸트가 주장한 것과 같이 고정적인 범주 체계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반합의 원리란 바로 그러한 변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이다. 정신의 운동이 마침내 그 정신을 지닌 공동체를 통해 표현될 때 물질세계 또한 함께 진화해 간다는 것이 헤겔의 관념론적 태도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원리를 수용하되 정신이 변화함에 따라 물질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변하기 때문에 정신도 변화한다는 유물론적 관점을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은 근대적 진화론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실제 역사를 가만히 관조해 보면 물질과 정신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변화에 대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언어와 기호 세계에도 유사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주로 구체명사와 같은 부류는 실재가 개념보다 힘이 강하고, 추상명사와 같은 부류는 개념이 실재보다 힘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주로 자연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반면, 후자는 주로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자연과학적 대상은 깊이 탐구될수록 간결하게 정의되는 반면, 인문학적 대상은 깊이 파고들수록 난해하게 정의되는 측면이 있다.

자연과학적 탐구의 대상은 유개념(함께 공유하고 있는 특질)과 종차(특별히 구별되는 특질)만으로도 쉽게 정의되지만,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은 그러한 방식을 적용하기에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것을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규정하고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정신현상 또한 오로지 뇌의 생물학적 활동의 결과일 뿐이라는 통섭주의가 만연하면서 모든 것을 물질의 문제로 환원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어쩌면 정신도 물질의 일부일지 모른다. 아니면 정신 자체가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이 만들어낸 그 수많은 정보와 가치는 결코 일원화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은 인문학적 탐구가 어떠한 대상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인식 주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정신활동에 의해 생성되는 수많은 내면적 가치들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기호가 표상하는 의미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지난한 과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여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소명의식을 던져준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추상적 개념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규정되었다가 새로운 동력을 얻으면 끊임없이 변태(變態)를 일으키는 반성적 정신활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주장에서처럼 인간의 정신능력 속에는 어떠한 대상에 고정적인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규정적 사고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을 때 새롭게 다가서려고 하는 반성적 사고가 함께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개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문학인에게 문학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추상적 개념에 속하는 문학 또한 시대와 환경에 따라 늘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기혁신의 과정이야말로 문학이 가야할 이념의 푯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문학답기 위해서는 한 시대를 보듬어 안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또 다시 발걸음을 땔 줄도 알아야 한다. 즉 문학에 관한 정의는 규정되기도 수정되기도 해야 한다.

이상 두서없이 장황하게 개념 정의의 어려움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푸념에도 불구하고 문학인은 자신만의 정의를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규정이야말로 관심의 가장 적극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너무도 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 ‘마약 등에도 그 나름대로의 존재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삼라만상의 가치를 모두 담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전문인이 되어 어떠한 가치를 대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영역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특출난 자기 표출이 요구된다. , 문학인이라면 응당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문학에 대한 자기 표출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 수많은 과정 가운데 가장 큰 획이 되는 지점이 바로 선택 규정의 순간이다. 문학이라는 우주 속에서 어떠한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하는 설계와 전략이 필요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하는 김춘수 시인의 독백에서처럼 문학인이 자신의 문학에 관한 개념을 지어주기까지 문학은 그저 공동체의 언어 속에 부유하는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2. 태양의 저편에 선다는 것

제 필자는 감히 필자가 하려고 하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문학에의 규정에 있어서 스스로가 지닌 한계와 그럼에도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감에 대해 언급하였다. 따라서 이전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이론적 토대들을 벗어놓고 오로지 내 속에 존재하는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는 크게 세상에 두 가지 문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태양의 문학이며, 둘째는 달의 문학이다.

태양의 문학은 그 이름과 같이 장엄하며, 한결 같으며, 모든 것의 위에 질서지어진 권위의 문학이다. 그것은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며, 여러 활동을 장려한다. 태양이 떠 있는 동안 대개의 생명은 태어나고 자란다. 한마디로 태양은 생산의 신이다. 반면 그것이 숨어버린 밤의 시간은 죽음과 공포의 연속이다. 움직임은 사라지고 살아있는 것은 잠이 들며, 해의 시간을 기다리며 숨죽인다. 잠들지 못한 자들의 시간은 외롭고, 두렵고, 쓸쓸하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매우 고귀하고 경이로운 존재이다. 이러한 태양의 정신은 정치’,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대표성을 지닌 인물 작품으로 화하여 인류에게 기여해 왔다.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수많은 천재 작가와 문인들이 나고 죽으며 시대를 대변하는 위대한 과업을 이룩해 왔다. 그들의 역사는 고전이 되고 전설이 되어 인류가 존재하는 그날까지 함께 숨 쉴 것이다. 태양, 그것은 따뜻한 온기를 걸친 영혼이며, 빛으로 화한 희망의 사신이기 때문이다.

반면 달의 문학은 밤의 문학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아우르지도 않고,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과 공포의 세계에서 삶을 건져 올리는 신비한 힘이 있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디게 하고 쓸쓸함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힘이 있다. 다수 속에 속하지 못하는 작은 자아들이 안식하는 태양의 그늘이다. 또한 숨결이 다해 앙상해진 뼈마디에 은밀히 내려앉은 축복이다. 우리는 그것을 눈물과 위안의 문학이라 부른다. 이것은 태양을 품은 달빛처럼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의 표출이다.

그것은 생각이라는 이름의 자유이다. 이 세상에 뿌리내린 존재, 즉 그림자 지닌 모든 것들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등가 교환의 법칙이다. 주면 주는 만큼 줄어들고, 빼앗으면 빼앗는 만큼 늘어난다. 따라서 생명활동이란 주고받는 경쟁 활동을 수반한다. 이러한 땅의 법칙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낳지 않는다. 다만 그 형상이 변화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상에도 나누어서 두 배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생각이다. 땅의 법칙을 초월한 하늘의 법칙, 그것은 곧 신의 흔적이다. 나누어도 배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이것,  생각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신적인 본성이 아닐까 싶다. 달의 문학은 이러한 신성을 발견하는 활동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인들이 태양의 문학을 지향한다. 그곳에는 최고의 상상력, 최고의 표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최고의 영광이 있다. 수많은 절기와 비기가 난무하고, 달필과 발변의 흔적이 스며있다. 대중의 사랑과 찬사가 있고, 명예와 부가 따른다. 옳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달의 문학을 지지한다. 극한의 노동으로 지친 정신을 위로하고, 수많은 군상이 던지는 말의 올가미를 태워 없애는 이것. 하늘과 바람과 노래만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와 주는 이것. 재물을 주지 않아도 영원히 내 안에서 샘솟는 이것.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이것. 가끔 한 그릇 떠서 나누어 마시면 두 배가 되기도 하는 이것. 높은 곳을 지향하지 않아도 스스로 높은 이것. 필자는 가끔 늘기도 줄기도 할 줄 아는 이 재주 많은 달빛이 참 좋다.

 

3.달빛은 강물 위에 출렁거리고

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달빛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것이다. 달이 품은 은은한 기운을 퍼트리는 것이 달빛이라면, 수많은 풍파 속에 한없이 출렁이고 있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은은한 달빛을 품은 수많은 문인들이 있었으리라. 모래알보다도 많은 생각이 뜨고 가라앉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달빛이 비취었을까. 이번에는 필자에게 큰 영감을 준 몇몇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간에게는 크게 두 가지 근원적인 욕구가 있는데, 첫째는 현실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갈망이며, 둘째는 이 세상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고 싶은 갈망이다.

1) 문학,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을 노래하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이 시는 함민복의 <선천성 그리움> 전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 존재와 하나 되기 위해 열심히 그를 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가슴은 자신의 왼쪽에서, 타자의 가슴은 타자의 왼쪽에서 뛰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심장은 포개어 질 수 없고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그리워해야만 하는 단절적 존재임을 자각할 뿐이다. 땅이 하늘을 사랑해서 새떼를 날려 보내지만 그 새떼는 결코 하늘에 닿지 못한다. 하늘이 땅을 사랑하여 뜨거운 번개처럼 내리치지만 순간에 번쩍하고 기어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아서 결코 나는 남이 될 수 없고 남도 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이란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갈망과 좌절은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라고 하는 서정윤의 <홀로서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정현종은 그의 유명한 시 <>에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하여 인간에게는 과 같은 고립된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다다르고 싶은 근원적인 욕구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백 속에는 섬을 둘러싼 장벽, 즉 바다라고 하는 이면의 존재가 숨겨져 있다. 누구나 그 바다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단절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숨은 행간이 전해주는 아련한 아픔을 공감하면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되는 기묘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즉 모두가 단절에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물질적으로는 닿지 못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다다르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애란 때로 길이 되기도 한다. 이는 함민복의 <>에서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라고 한 고백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충격적인 고백은 우리가 지금까지 섬의 울타리라고 생각한 그 물길이 오히려 무수히 많은 뱃길을 만들어내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이러한 발견은 함민복 스스로가 강화도에서 실제 어부생활을 했기 때문에 깨닫게 된 사실일 것이다.

2) 문학, 세상을 훌쩍 뛰어넘다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이 구절은 서정주의 <추천사>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아주 충격적인 고백이며, 또한 안타가운 고백이다.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올려 다오!” 하며 소리 높여 외쳐보지만, 그러나 마침내 화자는, 그리고 인간은 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오직 만이 갈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아마 이때 서으로 가는 달은 광덕이 향가 <원왕생가>에서 읊었던 그 달일지도 모르겠다. ‘달이여! 이제 서녁꺼정 가시닛겨(月下伊低赤 西方念丁去賜里遣)’라고 시작되는 이 시가에서는 서역에 계시는 부처님께 가는 달에게 왕생을 기원하고 있다. 서정주는 이렇게 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달처럼 갈 수 없는 우리 속세의 인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으로 가는 달의 초월적인 삶은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쭉 읊어지는 애타는 갈망일지도 모르겠다. 달에게 빌어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인 광덕이나, 향단이의 도움으로 잠시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려올 수밖에 없는 춘향이나 모두 한계지어진 생명일 뿐이다. 그렇다면 초월을 향한 갈망은 오히려 절망과 좌절의 단초가 될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개는 애초에 시도조차 해보려 하지 않는 것일테다. 도전은 냉혹한 현실을 더 강하게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초월이 현실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박현수는 그의 시 <참새에 대하여>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노니며 하늘 높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모습에 대해 안개가 숲을 지나듯 저녁연기가 탱자울타리를 빠져나가듯 초록 바늘잎에 깃 하나 닿지 않는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숲이 아무리 우거지고 탱자울타리가 아무리 촘촘하여도 안개와 연기를 잡지 못하듯 참새는 그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고 날아다닌다. 그는 앞서 <강아지풀>이란 시에서 몸으로 깨닫지 않은 건 아무 것도 믿지 않겠다 그림자 없는 것은 잊기로 한다라고 하여 지극히 현실지향적인 신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즉 그는 초월을 망각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자유로운 영혼, 즉 참새에 대해서 알고난 후에는 둥근 향나무에 스며드는 참새가 있어 그림자 지닌 것이 모두 슬픈 건 아니라 말할 수 있으니 이제 초월에 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놀라운 변화이다.

자유로운 영혼,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유혹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놀라운 발견에도 선뜻 다가서지 못할지 모른다. 이것은 참으로 헛된 망상이며, 지독히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도현은 그의 시론시 <헛것을 기다리며>에서 이러한 헛것을 키를 훌쩍 뛰어넘어 혼을 빼고 간을 빼먹는 여우와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우라면 오너라 나는 전등을 들지 않고도 밤길을 걸어 그 허망하다는 시의 나라를 찾아가겠다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등불조차 없는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는 그 길 위에 어쩌면 은은한 달빛이 드문드문 비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위험하고 은밀한 나눔

떠한 것을 잘 쌓아 체득하는 과정을 공부라고 하는데, 큰 공부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비기(祕技)이고, 다른 하나는 오의(奧義)이다. 즉 공부란 기술(skill)과 의미(message)의 복합체이다. 검도의 고수가 된다는 것은 베기와 자르기 등의 기술을 반복적으로 익혀 숙련도를 높였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동작이 표현할 심상(心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비기를 익히는 것은 오로지 반복에 의한 것이나 오의를 깨닫는 것은 어느 날 문득 만나는 생경한 체험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선승들은 돈오돈수 즉, 깨달음은 순간에 오는 것이며 순간에 닦는 것이라고 했다. 고수의 한마디는 때로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한 소절 얻어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곤 한다. 공부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체험을 기연(奇緣)이라고 한다. 여기, 지금까지 접한 문학에 관한 정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조정래 문학관에서 만난 하나의 구절이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하여야 한다.”

문학은 틀림없이 개도, 기계도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짐승같은 삶이나 귀신같은 삶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나 이외의 존재 즉 인류를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문학뿐만이 아니라, 학문, 종교, 예술, 정치 무엇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이 무수한 행위들은 때로 짐승의 짐승다운 삶을 위해 짐승에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5. 詩에 대하여

으로 다음과 같은 소박한 시론으로써 부족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시인()이란 의미에 자유를 찾아주는 사람.
시작(詩作)이란 의미가 자유로워지는 활동.
그러므로 시적(詩的)이란 의미가 자유롭다는 것이다.
곧 자유로운 의미를 지닌 글을 시()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