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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비평

[비평]'구르믈…' 우리에게 어울리는 꿈이란? (하)



한국 취업 신문 협력 기사(http://www.koreajo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7)





'[비평]'구르믈…' 우리에게 어울리는 꿈이란? (상)'과 연결됩니다.



지난 글에서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이상향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몽학이 이상향은 현실에 앞장서서 모든 모순을 뜯어고쳐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고, 황정학이
원하는 세상은 현실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분수와 한계의 범위 안에서 이상향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인물의 이상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대로 단조롭게 유지되며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럴 거였으면 주인공이 4명이나 될 필요성은 없다. 주인물 대열에 견주나 백지가 굳이 합류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주인공 4인방은 '이상향'에 대한 관념을 교환하며 서로의 꿈을 변화시키거나 생성시킨다. 그 소통의 방향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 그 방향을 영화에 너무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제대로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해 일부 인물의 존재 의미가 조금 퇴색된 면이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내용 전개에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역할 없는 인물은 그들 중에는 없다. 일단 그들의 꿈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이몽학은 비교적 변화가 없는 인물에 속한다. 마지막 순간에 모든 변화를 수렴하긴 하지만, 결말 이전까지의 전개상에서는 성격상의 변화를 겪지 않는 평면적 인물이다. 그는 일관되게 태양을 쫓을 뿐이다. 그를 두고 나머지 3명의 인물이 움직인다.


백지와 황정학은 조금 이몽학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움직인다. 백지는 이몽학에게 사랑의 꿈을 꾸게 하기 위해, 황정학은 이몽학이 해를 그만 쫓고 달을 쫓게 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이미 꿈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이몽학은 백지와 다시 사랑의 꿈을 꿀 수 없다. 추구하는 것의 성격이 완전히 다른 황정학과는 당연히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자신의 꿈을 확고하게 믿은 나머지 강한인물이 되기는 하지만 타 인물과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런 이몽학과의 소통에 있어서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이 견주이다. 이몽학은 견주를 통해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간 황정학이 죽으면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칼을 멈춘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똑같이 행동함으로 황정학이 자신의 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백지와의 사랑도 자신의 꿈에 똑같이 품게 된다.


그는 악역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자신의 욕심에만 눈이 멀어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악역은 아니다. 가끔 백지와의 접촉과 왜구의 침공에 있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장면에서 그가 악인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장면에 있어서 너무 이몽학의 잔인성이 부각하는 표현은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그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해 조금 아쉽다.


지와 황정학의 이몽학에 대한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견주는 얼핏 보면 이몽학과 비슷한 인물이다. 초기에 그는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해 불만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지만 단순히 불만사항일 뿐,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그는 그저 열등감밖에 없던 찌질이 였다.


그는 백지와 황정학을 만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가 먼저 만난 것은 황정학이지만 백지에게 먼저 큰 영향을 받는다. 첫눈에 백지에게 반해버린 견주는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 사랑을 택한다. 그것은 곧 견주의 복수에 대한 의지가 약했기 때문에 백지는 그의 약한 의지로는 이몽학을 이길 수 없다고 하며 견주에게 '꿈'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후에 황정학이 이몽학에게 죽임을 당할 때 견주는 '꿈'에 대해 깨닫는다. 그리고 이몽학은 꿈을 위해 버린 '사랑'마저 자신의 꿈 안에 녹여버린 견주는 이몽학을 넘어서게 되어 그를 죽이게 된다. 이것은 달의 빛이 태양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몽학은 목적을 위해 사랑을 버림으로써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 사랑에 막혔다. 이것은 목적만을 지닌 꿈은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해 보이는 사랑일지라도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견주는 이몽학을 죽이면서 마지막으로 그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이몽학이 죽을 때에는 황정학과 백지와 소통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황정학이나 이몽학은 방법이 달랐을 뿐 이상향을 이루겠다는 목적 하에 같은 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견주는 황정학과, 이몽학을 대신해 그들의 칼 두 자루를 양손에 거머쥐고 왜구와 싸우다 죽는다.


네 명의 사람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 서로 소통하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나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의 꿈을 가지게 된다.



 




하나로 융합된 그들의 꿈의 최종태는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황정학의 꿈에 따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견주조차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개척한다기 보다는 '이상향의 추구' 그 자체에만 목적을 두는 것에 가깝다. 이것은 우리는 노력해도 결국 안된다는 뜻으로도 보여진다.
 우리의 민족적 정서에 가깝기는 할지 몰라도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알고 있고 거기에 만족해서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견주는 결국 달에 다다르게 되었지만 왜구의 습격은 극복하지 못한다. 중국의 영화같았으면 궁극단계의 깨달음에 도달한 주인공은 무적이 되어 원하는 바를 마음껏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주는 실패했다. 우리의 정서에는 이것이 맞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설'에는 실패한 주인공이 비장미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것 처럼…….


 







아니꼽겠지만 일단 이것이 옳은 해석이라 치자. 이제는 이 주제가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을 바람직한 것이라 결론지어 버린다면 과연 이것이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이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조선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달처럼 사는 것이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영화는 그저 민족의 실패담을 보여주며 '비장미'를 나타내는데 그칠 뿐인 것인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그러한 절망의 정서를 전해주어야 하나? 결국 '희망'이란 것은 우리에겐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거창하게는 아니라도 원하는 바는 이루며 소박하게 사는 꿈을 이루는 것 정도는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의 올바른 이상향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싶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가 이미 서구화되어버린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점은 저승에서나마 견자가 달을 베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저승이긴 하지만 견자는 그곳에서 거의 당시의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달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그들에게 '절대적 진실'에 가까웠던 달을 향해 견자는 칼을 휘두른다. 이것은 마지막 순간 이몽학에게 배운 그의 한쪽 손에 이몽학의 칼을 쥐고 싸우게 한 진취성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마저 벗어 던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written by colum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