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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비평

[비평]아리에티 제대로 이해하기 (상)



한국취업신문 협력 기사
(http://www.koreajo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5)





지난 번 글에서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입장에서 마루 밑 아리에티에 대한 영화 감상 리뷰를 작성해 보았다. 이번 기사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가능하면 영화를 보고 나서 읽는 편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에게 이 영화의 주인공을 꼽으라 한다면 대부분 쇼우와 아리에티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리 있는 맞는 말이다. 이야기 대부분의 초점과 전개가 그들의 관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접근한다면 조금 달라진다. 이야기의 중심 갈등을 형성하는 중요 축이 아리에티와 쇼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인 족(아리에티)을 사이에 두고 쇼우와 집사할머니가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면 쇼우와 집사할머니가 주인공이 된다. 소인 족은 이 갈등에서 중요한 배경을 담당하지만 정작 대립구도에서는 살짝 빠진다. 소인 족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마루 밑'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아리에티는 소인 족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쇼우를 통해 인간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함으로써 주목받을 뿐이다.


평범한 구성의 영화라면 전개의 주축인 쇼우와 아리에티가 주인공이며 그들의 갈등이 작품의 주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물들에만 초점을 맞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인과 인간이라는 두 종족에 대한 복잡한 거대 담론이다. 초점이 소인에게 맞춰지는 듯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고, 하여간 복잡하다.


덕택에 뭔가 핀트가 어긋나 보일지도 모를 갈등구조가 생겼다. 이런 약간은 생소한 구조가 어떤 관객들에게는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가뜩이나 지루한 차분한 분위기의 영화인데 흐름을 제대로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에 몰입하기란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마루 밑 아리에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내 인물의 역할과 그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모든 예술 작품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이다. 모든 영화에서 주인공이 인간일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인간이 아닌 대상에 인간의 모습을 투영하는 경우도 역시 인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 역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다고 이미 말했다. 다만 인간이 작품 내부에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인간이 아닌 대상을 주인공으로 간접적인 주제 전달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메시지를 던져준다면 인간이 주인공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제목에까지 등장하는 소인 족의 역할은 뭘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소인 족은 인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배경인 '상황'을 만들어 줄 뿐이다. 제목에까지 등장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리에티에게도 겨우 조연 취급이나 하는 것이 불쾌하다면 '특급 조연'이란 말을 쓸 수도 있다. 그것에 만족하며 우리는 '인간'인 외할머니와 집사할머니, 그리고 쇼우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야 하며 이 중 대립적인 구도를 가지는 집사할머니와 쇼우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주인공 한 명을 꼽자면 쇼우가 될 수 있고, 반동인물은 집사 할머니. 소인 족은 그들의 행동과 갈등을 이끌어내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 중 아리에티는 그 중에서도 '특급조연'으로서 소인 족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쇼우의 외할머니는 그들의 관조자이다.


왜 '배경'에 불과할 뿐인 소인 족에 대해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묘사해 감상에 혼란을 줬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주인공이 아닌 인물이 작품의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에 몰입이 방해된 부분을 생각하면 애초에 소인 족의 분량이 너무 많지 않나 싶다.


그러나 소인 족의 역할을 무시하면 안 된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분량을 늘린 이유는 따로 있다. 그들을 배경이라 한 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뿐. 앞서 언급했다시피 소인 족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아리에티를 매개로 그 이야기 중 일부가 인간과 얽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그들만의 영역이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를 넘어설 만큼이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또 인간의 이야기와 소인의 이야기는 비슷한 주제와 연속적인 공간을 지녔을 뿐 서로 다른 두 이야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두 작품을 더 만들어 낼 수도 있을 정도로 소인 족의 이야기는 큰 비중이 놓여진다.


그렇다면 두 종족 중 인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도 소인의 비중을 줄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관객이 소인 족에 몰입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부차적 효과 때문이다.


영화는 소인 족에 친화적인 영상을 주로 보여주고 그들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상세하게 묘사한다. 관객은 그들을 주인공이라 여겨 소인 족에 몰입하게 되고 소인 족이 인간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시각에서 사고를 하게 된다. 그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서 인간을 바라보며 그들을 평가한다면 그 화살이 나를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며 혹 자신이 '악'이라는 생각을 들지라도 감정적으로 불쾌하지 않을 수 있다. 관객은 소인 족의 입장에서 인간을 가해자로 인식하겠지만 그에 감정적으로 동의를 하고, 그 사실에 저항하고 변명하기보다 스스로 반성하는 쪽을 택한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소인 족은 인간의 집 밑에 숨어 살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인간에게 빌림으로써 해결한다. 이 때의 빌림이란 통상 우리가 쓰곤 하는 의미의 빌림이 아니다. 빌림이 성립하려면 상호 간의 허락과 그것을 되갚겠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인 족의 빌림은 일방향적으로만 이루어 진다. '빌림'의 행위란 밤 늦게 몰래 행해지고 인간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소인족은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않는다.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몰래 다니는 소인 족에게 빌리는 것이란 사실 상 불가능하다. 밤에 주인 허락도 없이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오히려 훔치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인족이 생각하는 '빌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빌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미를 조금, 아니 많이 확대해서 지구적 단위로 생각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지구에서 비롯됐고 그 안의 생물은 지구의 것들을 잠깐씩 빌리는 행위로서 살아가게 된다. 소인들도 마찬가지의 원리로 그것을 인간을 거쳐 그것을 빌릴 뿐이다. 그래서 전혀 미안한 마음같은 것 없이 눈치만 채지 못하게 당연한 듯이 그것을 빌려 살아간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는 얌체 같지만 사실 지구적 단위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 없이 자연에서 비롯한 물건들, 다른 동물들이 만든 물건을 훔쳐서 쓰지 않는가.

 




영화 전반부에서 인간과 소인은 서로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고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심'의 선을 넘는 더 이상의 시도는 없었다. 그것은 인간과 소인을 각각 대표하며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인물이 쇼우의 외할머니와 아리에티의 아버지처럼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나올 정도의 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서 인간과 소인 족의 접촉이 불러올 결과에 대하여 미리 짐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후에 이 균형을 깨고 사건을 전개시키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어른'과 대비되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라 표현된다. 아이에는 인간 아이와 소인 족의 아이가 있는데, 이 중 인간의 경우 쇼우라는 한 인물만으로 모든 인간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특징에 따라 집사할머니와 쇼우로 나눠졌다. 인간의 아이 중 지나치게 아이다워 잔인한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인물을 집사할머니로, 점잖지만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인물을 쇼우로 대표했다. 노인인 집사할머니를 '아이'로 분류한 이유는 중요한 이유는 이 구분에서는 '나이'보다 정신적 성숙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화 속에서는 '어른'과 '아이', 아이 중에서도 잔인한 아이와 점잖은 아이로 총 삼분되는 인간 형이 보여진다. 어른은 정신적으로 성숙해 현명하고, 아이는 두 부류가 있지만 결국은 둘 다 현명하지 못하다. 잘못된 종족이나 자연에 대한 가치관을 지닌 것이 문제의 원인이 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 보이는 어른과 달리 이들의 사고는 아직 미성숙할 뿐이다.


 

'[비평]아리에티 제대로 이해하기 (하)'로 이어집니다.


[written by colum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