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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비평

[비평]아리에티 제대로 이해하기 (하)



한국 취업 신문 협력 기사
(http://www.koreajo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6)





'[비평]아리에티 제대로 이해하기 (상)과 연결됩니다.'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쇼우가 아리에티를 만나고 그와 집사 할머니가 아리에티를 찾아다니면서부터다. 쇼우와 집사 할머니는 소인 족을 직접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였건 의도치 않았건 상대적 약자인 소인은 피해자가 되고 만다.


인간과 소인이 접촉하는 데 있어 보다 강자인 인간이 악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문제는 비단 인간과 소인의 관계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동물, 소인과 그보다 약한 벌레 등 모든 다른 문제에서 통용된다. 그 조그마한 아리에티도 쥐며느리를 심심풀이로 말아 던지고 놀지 않았던가. 초점을 약자 쪽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 항상 강자가 악역을 맡게 된다.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좋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멸종되어가는 소인 족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도와주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선의를 베풀기까지의 과정은 소인에게는 분명히 재앙이었다. 이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났던 장면은 역시 쇼우가 인형의 집 부엌을 소인 족에게 선물하는 장면일 것이다. 엄청난 지진과 함께 집 천장이 열리고 거대한 손이 내려와 부엌을 뜯어내는 장면은 그 어떤 천재지변에도 비할 바 없었다. 인형의 시점에서 이 장면을 보여준 것은 감독의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리에티의 어머니는 멍하니 겁에 질려 벌벌 떨었을 뿐 다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집사 할머니의 경우에는 미성숙한 정신 상태를 지닌다는 점에서 쇼우와 같지만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영화 초반에 소인 족에 의해 잠깐 언급되는 '아이의 잔인성'이라는 개념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한 캐릭터다. '잔인하다'의 개념이 없을 정도로 순수해서 가장 잔인하다. 그녀는 우리의 모습과 가장 가깝다. 소인가족을 신기한 수집품이라도 되는 양, 쥐나 병아리처럼 잡으려 하고 가지려 한다. 아리에티의 어머니를 잡아 곤충 채집하듯이 비닐 랩으로 싸고 구멍을 뚫어준다. 그녀는 소인족을 밟아 죽인다 해도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낄 것이다. 기껏해야 '에이, 죽어버렸네. 아깝네.'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릴 땐 미처 몰랐던 우리의 잔인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릴 적 개미 다리를 뜯어보았거나 메뚜기를 채집해 가둬놓고 키웠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리고 또 생각한다. '지금은 그 때와 다른가?'


쇼우와 집사 할머니는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가진 '사람'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것을 각각 어린이와 할머니로 형상화 해 접근방법이 다른 두 부류가 있을 뿐 결국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의 대단원은 소인 족이 그들의 보금자리이던 마루 밑을 떠나면서 정리된다. 그들이 인간과 접촉해 그들 생활에 균형이 파괴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쇼우와 아리에티는 하다못해 서로 연락처 교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는 작별인사를 마지막으로 영원히 끝이다.


항상 해피엔딩으로만 끝나던 지브리스튜디오의 스타일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다. 결국 서로 다른 것은 다른 대로 살아야 할 뿐 공존의 길은 없다는 비관론자의 주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만 하며 유아적인 전개로 일관하는 것 보다는 낫다. 만약 그랬다면 마루 밑 아리에티는 초등학교 저학년용 환경교육 애니메이션처럼 됐을 것이다. 지브리스튜디오가 아니라도 그 정도의 결말을 낼 수 있는 영화사는 널렸다.


또 따지고 보면 슬픈 결말도 아니다. 엔딩도 비극 치곤 너무나 발랄했고 희망찼다. '그 후로 소인족은 멸종했다.'가 결말이라면 틀림없는 비극이겠지만 그들은 다만 쇼우의 곁을 떠났을 뿐,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수 있다. 이별은 항상 아쉽지만 나쁠 이유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쇼우의 진심을 확인해서 그들이 쇼우네 집을 떠나지 않는다면? 혹은 두 종족 간에 양해 협정이라도 맺는다면? 그것은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과연 단순한 아랫 집 사는 이웃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게 영화의 결론이다. 인간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그들은 이제는 수면에서 드러내 놓고 인간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인간은 서슴없이 그들을 위해 작은 성의를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뭐가 문제냐고? 문제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다. 언젠간 분명 소인은 인간과 일종의 주종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애완 고양이, 살아 움직이는 인형, 희귀 종인 곤충이 되어버릴 것이다. 종 정체성을 잃는 것. 아리에티의 아버지가 인간과 그들의 선의를 경계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겠지만 아리에티의 가족은 인간의 애완동물로서 오래도록 사는 것보다 위험하고 불확실한 자립의 길을 택했다. 선택으로 인해 그들이 멸망할 지라도 그것은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긍정적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이 아닌 첫 작품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감독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번 작품은 그의 여태까지의 작품과 비교당하지 않을 수 없다. 각본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썼다고는 하나 그가 지브리스튜디오 계승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감독인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그 강력한 후보라는 점. 이번 작품이 여태까지의 것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분명 이것은 가치 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어떤 부분에서 지브리스튜디오답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앞으로 변화될 지브리스튜디오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미야자키 하야오' 표 작품과는 달랐어도 그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만족할 만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인물 중에서는 집사 할머니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그 동안 두드러지는 악역이 없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 작들과 달리 아주 강력한 악역이 영화 전면에 드러났다. 이전에도 '악역'으로 비춰지는 인물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그들은 주 인물에 비하면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악역인 집사 할머니는 거의 '주연급' 캐릭터로 등극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집사 할머니는 갈등의 중심부에 있다. 갈등의 전개 양상에 있어 집사 할머니는 쇼우와 심리적 전면전을 벌이는 등 아예 '선'과 '악'으로도 보여지는 갈등을 가져온다.


악역의 강화는 영화의 극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는 등의 장점 외에도 인간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스스로를 미화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옹호나 정당화 대신 비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발전이다.

그 동안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래도 사람은 착하다.'는 공식이 깨진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영화에서의 공식은 깨지라고 있는 법. 사실 그의 '성선설'에 의존한 듯 한 시각이 현실과 동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최고였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천재적인 능력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공식은 수명을 다 했다. 수명 다한 명품을 어설프게 고쳐 쓰는 것 보다 싸구려 새 것을 사는 것이 낫다. 다른 사람이 어설프게 그를 따라하다가는 정말 유치원생이나 좋아할 법한 졸작이 나올 수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미지만 남을 뿐 그의 작품세계는 사라지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갈등구조가 의도했던 만큼은 흥미진진하지 않았던 것 같아 조금 아쉽다. 영화 구조가 보기보다 복잡했던 것과 전체적 분위기가 너무 잔잔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가장 스릴이 넘쳐야 할 장면에서 별 감흥이 없었다면 그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물론 몰입만 잘 됐다면 굉장히 긴박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소재가 너무 일상적이고 아기자기해서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고나 할까? 집사 할머니가 아리에티의 어머니를 병에 담고 랩으로 싸는 장면을 보면서(심지어는 숨구멍까지 뚫고) 필자는 풀벌레를 채집하던 어릴 적 추억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어버렸다. 나만 그랬나? 나만 쓰레기인가?


'극적인 장면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확실히 경계해야한다. 어떤 작품이든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소는 확실히 제거대상이기 때문이다. 악역이라는 와일드 카드를 썼지만 악역이 없던 작품들보다도 긴장감과 몰입도가 떨어진다면 훗날 그것을 명작이었노라고 회고하기 힘들 것이다.


각각의 플롯을 유기적으로 엮은 구성과 주제의 깊이는 만족할 만 했다. 주제의 대강의 줄기는 쉽고 간단하게 제시된 반면 딱 어른들만 알 수 있을 법한 난이도의 곁가지를 여기저기 뿌려놓았다. 아직도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은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보았을 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 전달이 다소 자연스럽지 못한 점은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게 미덕인 핵심 요소를 대사를 통해 직접 '말해줌'으로써 재미가 반감되었고 너무 계몽적인 환경 영화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어차피 말로 해 줄 거면 뭐하러 큰 돈 써가며 영화를 만드는가? 한 20자 정도의 표어라면 훨씬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다.


또,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주인공들의 대사가 너무나 오글거려서 살짝 닭살도 돋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스튜디오의 전통을 지키면서 부분적으로는 참신한 시도가 보여진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아직은 과도기적 단계의 한계 역시 보여 지지만,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없이도 존립 가능한 지브리스튜디오의 가능성을 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많은 발전을 통해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written by colum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