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야기/영화 비평

[비평]'살인의 추억'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파헤치다 (하)

한국 취업 신문 협력 기사(http://www.koreajo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56)











지난 포스팅에 기반을 두고 이번에는 살인의 추억의 표면적인 서사구조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도록 하겠다.

영화 틈틈이 의미 해석과 관련된 미세한 힌트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중요 흐름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 너무 깊은 분석은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지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고, 두만의 비합리적이고 구시대적인 수사의 문제점이 최초로 노출된다. 현대식 수사 개념이 없고, 아무나 범인으로 몰고 가다 아니면 그만이다. 이것은 두만과 용구에 의해 주도된다. 여기서 두만과 용구라는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두만과 용구는 손발이 척척 잘 맞는다. 일단은 두만과 용구를 묶어서 생각해도 문제점이 없다. 

그들은 한국의 구시대적 형사의 표본이다. 경찰 대 국민이라는 구도에서 봤을 때 지배계급의 일종인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 나라의 지배계급이라고까지 확대할 수도 있다. 굳이 두만과 용구에 차이를 둔다면 두만이 지시 하고 용구가 뒷일을 맡는 점으로 미루어 두만은 용구보다 상위 계급이고, 용구는 그 심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용의자인 광호가 잡힌다. 그는 두만과 용구의 비 합리적 수사에 의한 첫 번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사고를 겪어 얼굴에 화상을 입고,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렸다. 얼굴의 화상자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데, 이 트라우마가 그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의 죄는 멍청한 것밖에 없다.

광호를 포함해 앞으로 등장할 모든 용의자는 당시 한국의 국민을 상징한다. 광호는 순박하지만 멍청하고, 공권력에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다. 힘든 삶을 살아왔고, 지난 상처가 현재에까지 고통이 된,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불쌍한 국민이다.

서울에서 태윤이 사건 수사를 위해 내려온다. 두만과는 달리 서울에서 온 엘리트에다 선한 인상에 싸움도 못한다. 두만은 열등감을 느껴 자신이 태윤보다 더 능력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경쟁한다.

두만이 전근대적인 지배권력을 뜻한다면, 태윤은 미국의 FBI를 표방한 점으로 보아 서구식 사고방식에 입각한 지배권력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의 형사 시절 살인자를 놓친 것이 사람을 죽게 한 것을 마음 깊이 상처로 간직하고 있다. 후에 이 강박관념이 냉정심을 잃게 하기도 하는 인간다운 인물이다. 즉, 서구식 사고방식을 지녔지만 마음 속은 한국인이다.

두만과 용구의 협박으로 인한 거짓자백으로 광호가 범인으로 확정된다. 태윤이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수사가 종결된 와중에 찬물 끼얹지 말라며 쉬쉬한다. 이것을 주도하는 인물은 반장이다.

반장은 대부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형사를 감독하기만 하며 지시한다. 실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무능하고 상징적 존재에 가깝다. 당시의 사회적 인식이나 흐름의 대변자 역할을 하거나, 혹은 지배계급보다 더 상위 계급의 (대통령 쯤으로 추측되는)무능한 우두머리다. 후에 반장이 바뀌는 것은 시대가 변화됨을 의미한다.

광호 사건은 광호의 아버지가 나타나 현장검증을 엉망으로 만든다. 이후 법원에서 영장 기각을 해서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반장이 태윤처럼 서류나 절차를 우선시하는 인물로 교체된다. 이는 사회 분위기가 근대적, 신식 정치 쪽으로 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완벽한 근대화라고 보기 어렵다. 신 반장도 껍데기만 근대적 인물이지 속은 어차피 권위적인 폭력적이다. 그는 수사 근대화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밥통을 지킬 뿐이다. 당시 시대가 변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내실은 발전이 없었던 것과 매치하면 적당하다.

신 반장이 태윤과 죽이 잘 맞자 두만과 용구는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갈등을 극대화한다. 자신의 성과를 부풀리기 위한 연구만 계속하고 상대방의 의견은 무조건 반대해서 사건에 진전이 없다. 태윤이 서류를 통해 새로운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수사를 주도하지만 두만은 잘 되지 못한 부분만 꼬집는다. 태윤이 두만의 수사방법을 지적하자 두만도 태윤의 수사 방법은 한국과 맞지 않은 미국의 것임을 지적한다.

반장이 범인 검거의 새 방향을 함정수사로 정한다. 여경인 권기옥을 미끼로 내보내지만 성과는 없다. 권기옥은 수사보다는 한낱 함정수사에서 '함정'역을 맡을 뿐이라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비중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후에 범인을 검거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비중도 이제 무시해선 안될 정도로 자라났음을 의미한다.

권기옥은 함정수사를 하는 도중 여중생들을 만나 그들을 통해 안성여중에서 범인과 관련된 소문을 듣는다.

또다시 피해자가 한 명 추가되고, 어떤 증거물도 남지 않았음을 이유로 두만이 범인은 무모증일 것으로 추측한다. 태윤처럼 나름 '추리'를 해 보지만, 이미 동료의식이 없는 상황이라 태윤은 두만의 추측을 간단히 무시한다.

여경 권기옥이 라디오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틀 때마다 범행이 일어난 다는 것을 지적해 해당 사연을 범인이 보낸것이라 추측한다. 태윤과 반장은 기옥의 의견에 동조하지만 여성의 역할에 대한 구시대적인 인식을 지닌 두만은 비웃는다.

그래서 태윤은 태윤대로 라디오 방송국을 헤집고 다니고 두만은 목욕탕을 헤집고 다닌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두만과 용구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사건현장에 갔다가 자위행위를 하던 두 번째 용의자 조병순을 발견한다. 태윤도 근처에 있었지만 셋 모두 그를 놓친다. 그러나 두만이 조병순을 찾아내고, 마치 직감으로 딱 잡은 것처럼 연기하자 태윤이 놀라워한다. 이 때부터 태윤은 마음 속으로나마 두만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비록 두만이 태윤을 의식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둘의 갈등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용의자로 잡힌 조병순은 영장도 없이 조사, 아니 고문당한다. 시민은 형사를 비난하고, 조병순을 옹호한다. 조병순은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주위의 평판도 좋다. 집에서 성생활을 해결할 수 없어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성욕을 분출하는데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사건현장에 갔을 뿐이다.

조병순은 광호와 비슷하게 당시의 국민을 상징한다. 기본적 욕구가 부족한 상황과 그 해결을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이 죄가 되는 상황을 비판한다.

조병순은 잠안재우기 고문 때문에 자신이 범인이라고 거짓자백을 한다.

그 과정에서 태윤은 병순에게서 안송여중의 학생에게 들은 소문을 직접 듣게되고, 태윤은 안송여중으로 찾아가 초소에서 만났던 김소현을 만난다. 소현의 말을 듣고 간 화장실에서 양호 선생님을 만나고 양호 선생님의 말을 따라가 피해자 중 살아남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강간 때문에 임신을 하게 됐다.
 
범인도 사회의 구성요소인 점으로 보아 범인이 피해자에게 임신을 시킨 것은 암울한 시대 상황이 잉태한 우리 민족의 심화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피해자는 범인의 손이 상당히 부드러웠음을 진술한다. 태윤은 두만에게 손이 거친 조용구는 범인이 아니라며 풀어주라 한다. 마찰이 불가피했지만 태윤이 진심을 담아 소통을 시도하자 두만은 스스로 반성하며 병순을 풀어준다. 형사 내부의 경쟁이 슬슬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한 편, 두만과 용구의 비합리적 수사에 대한 비난을 받은 반장은 두만과 용구를 강하게 비난한다. 이는 주위 강압에 의한 반사적 행동이다. 여태까지 그들의 수사 방법에 신경도 쓰지 않다가 일이 터지니까 그제서야 반응하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뒤늦은 전시행정을 나타낸다.

라디오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나오고, 비마저 오는 밤이다. 범행이 일어날 것이 확실히 예측된다. 형사들은 범인을 잡을 준비가 되었지만 전경들이 모두 시위 진압 현장으로 가 지원병력이 없어 범행을 막지 못한다.

태윤이 후에 살인을 막지 못한 것도 '형사인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과 시민을 지켜야 할 전경이 오히려 그들과 싸우러 간 것이 범행을 막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특정 개인을 상징한다기보다 당시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혹자는 범인이 상징적으로 두만과 동일시된다고 해석했는데 두만이 당시 사회의 지배 계층을 상징하는만큼 전혀 엉뚱한 추측이라고는 볼 수는 없으나 범인이 지배계층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그러한 사회 구조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을 범인으로 보는 쪽이 옳다고 판단된다. 

세 번째 피해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차마 인간이 했다고 볼 수 없을 짓을 그들은 발견한다. 이것을 보고 두만은 그간 자신의 잘못과 태윤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 마음을 연다. 두만이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한 것읻. 계속 문제가 발생하자 기존의 지도자 층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개선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윤에게 마음을 열자 우월하게 보였던 태윤도 가짜 신발이나 신는, 결국 자신과 같은 존재인 것을 본다. 둘은 결국 같은 배를 탔고 동등한 존재임을 이제서야 인지한 것이다. 두 인물이 감정적으로 동일시되는 순간 성격도 비슷하게 융합된다. 태윤과 두만을 합쳤다가 다시 둘로 나눈 인물 둘이 탄생한다.

태윤은 한국에 걸맞지 않은 냉철한 미국적 모습을 어느 정도 버린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과 자책감을 가득 내비치는 감정적 인물로 변하고 못 하던 싸움도 잘 하게 된다. 두만은 반대로 침착해져서 나름 '전략'이라는 것을 쓰게 된다.

이제 두 형사는 전 근대적 한국도, 전형적 미국도 아닌, 한국식 근대적 형사로 업그레이드 된다. 정체성을 모르고 대립하던 지배계급이 위기의 순간에 적대를 풀고 하나로 뭉친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는 사건이 너무나 술술 풀리는데 지배 계급의 모순이 해결되고 나니 사회 전반이 정상적으로 돌아감을 나타낸다.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서 범인이 확실시 되는 용의자인 현규의 거처를 알게 된다. 그들은 현규를 잡아들이며 수사 종결의 가닥을 잡는다.

음모가 없다는 점, 라디오 청취 시간과, 이사를 온 시점 등 모든 정황이 그가 범인임이 확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고, 목격자가 없어 난황을 겪다 문득 광호가 목격자일 것이라 생각을 모은다.

 광호는 범인은 아니지만 범행의 내막을 다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목격자인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하지만 그 동안은 두 형사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백광호를 찾아 그들은 광호의 아버지 백씨의 고깃집을 찾게 된다. 이 때 텔레비전에서 성 고문 사건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그것을 보던 손님들이 그 형사의 성기를 잘라야 한다면서 욕을 한다. 반장이 그의 폭력성 때문에 앞으로 취조실을 들어오지 말라고 해 술집에서 만취되어 있던 용구는 소주병으로 텔레비전을 깨고, 손님과 시비가 붙어 그들과 싸운다. 

광호가 그것을 보고 그의 폭력성에 흥분해 부서진 의자 다리로 용구의 다리를 내리치는데, 못이 박혀있어 용구의 다리를 찌른다. 후에 용구의 다리는 파상풍 때문에 잘리게 된다.

용구의 다리와 관련된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본다면 전체적 흐름과는 살짝 빗겨간다. 하지만 서사 이면의 이야기를 따져보았을 때는 흐름에서 엇나가지 않는다. 두만은 이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변화했다. 그러나 조용구는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못했다. 두만도 이제 자신과 다르다는 괴리감에 술을 마신다. 그리고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벌을 받는다. 죄 없는 용의자를 걷어차던 워커를 신은 발, 그 발을 잃게 된다. 이것은 뉴스에서 나온 성 고문 사건을 보고 술 집 손님들이 '그 형사의 성기를 잘라버려야 한다'고 말한 것과도 유사하다.

성 고문 사건의 형사와 조용구는 전 근대적인 형사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 성 고문을 할 때 형사가 시민을 억압하던 도구는 성기였고, 용의자를 향한 폭력의 도구는 용구의 구둣발이다. 워커를 못 신게 되었다는 것은 성 고문 사건의 형사의 성기를 자르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죄 없이 당하고만 있던 광호가 용구를 공격했다는 것은 억압당하기만 하던 국민도 한 번 크게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다.

두만과 태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던 광호를 겨우 붙잡아 대화를 시도한다. 범인의 얼굴을 묻는 대목에서 갑자기 광호가 불이 뜨겁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한다. 두만은 참지 못하고 흥분한다. 그 때 술집의 손님이 끼어들어 난장판이 되고(시나리오에서는 광호의 아버지가 끼어든다.) 광호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친다. 겨우 따라잡지만, 광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다. 그 피는 마치 두만이 그를 죽인 것처럼 흠뻑 뒤집어쓴다.
 
광호가 죽은 것은 그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만이 감정적으로 흥분하기만 해도 그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정도로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광호의 피를 두만이 뒤집어쓰는 것도 광호를 죽인 것이 두만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때 기차가 지나가던 철길도 꽤나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철길은 당시의 사회구조로서는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을 의미한다. '기차'라는 외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개 대한민국의 형사는 철길을 넘지 못한다.

이후 범인 것이라 추측되는 정액 샘플을 채취한다. 유전자 감식결과가 현규의 것과 일치하게 되면 현규가 범인임이 확실해 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감식 기계가 없어 미국에 의뢰를 해야한다.

우리의 수사를 하는 데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 우리는 미국이 없으면 자립할 수도 없고, 이미 미국의 일종의 속국으로 전락한 상황을 의미한다.

감식 결과가 나올 때까지 현규를 잡아둘 뚜렷한 증거가 없어 일단은 그를 풀어주게 된다. 하지만 심증은 거의 확실해서 태윤이 그를 24시간 감시한다. 하지만 도중 깜빡 졸아 현규를 놓친다. 겨우 그가 버스를 타는 것을 목격했지만 차가 고장나 잡지 못한다. 그 차는 전에도 자주 고장나던 것이다. 형사의 차가 엉망이어서 범인을 놓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당연한 부분에서도 부실했음을 뜻한다. 철길과 더불어 당시 사회구조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현규를 잠시 놓친 그날 밤 또다시 범행이 일어난다. 함정수사 때 봤던 여중생 소현이 죽는다. 태윤은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돼서 거의 제정신을 잃고 현규를 찾아가 그를 때리며 철길까지 끌고 온다. 그리고 자백을 듣고 그를 죽이려 한다. 

이 때, 두만이 미국에서 날아온 감식결과를 가지고 온다. 종이에는 유전자 정보가 불일치해, 태윤은 범인이 아니라고 적혀있다. 태윤은 우리가 왜 미국 말을 들어야 하냐며 울부짖는다.

이전의 과오때문에 반성을 많이 한 두만은 오히려 침착하다. 그 때문에 결국 현규를 놓아주게 되지만 분이 풀리지 않은 태윤은 그를 향해 총을 쏜다. 하지만 맞지 않고 유유히 철길을 따라서 사라진다. 시나리오에서는 조금 더 극적으로, 현규는 철길 너머로 도망가고 태윤은 그를 향해 총을 쏘지만 마침 그 때 기차가 지나가는 것으로 나온다. 기차 칸이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사이사이로 현규가 보여 총을 쏘지만 결국 기차가 총알을 가로막는다.

이 때 또 나오는 철길은 앞서 나온 철길을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고 왜 넘을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벽은 '미국'이다. 그가 범인인 것이 확실시 되는데도 미국의 감정결과에 따라 서류가 그가 아니라면 풀어줘야 하는 것이다. 기술이 부족한 한국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짜 비극이다. 지난 글의 갈등구조를 그린 표에서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온 이후 영화의 갈등이 수직상승하는 이유도 범인을 알지만 잡지 못한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서, 두만은 형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 우연히 첫 번째 살인사건 현장이 일어난 곳을 지나가게 되고, 그 곳에 앉아 시신이 처음 누웠던 장소인 하수관을 살펴본다. 한 아이가 나타나서 전날도 어떤 사람이 이 곳에서 '자신이 예전에 했던 일이 생각난다'며 하수관을 살펴봤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만은 놀란 듯 카메라쪽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범인을 잡지 못해 열린 결말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실제 사건의 범인은 알 수 없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확실히 현규가 범인이다. 영화를 본 관객은 모두 현규를 범인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감독이 그렇게 의도했기 때문이다. 열린 결말이지만 범인을 알고 있다면 사실상 닫힌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때의 두만의 시선은 무엇일까? 두만이 워낙에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이 시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자기 자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부터 어디선가 이 영화를 보고 있을 범인을 향한 시선이라는 것 등등 다양하다.

이 모든 해석 중 어느것 하나도 딱히 틀렸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실질적으로 외부 이야기는 닫힌 결말에 가깝지만 숨은 이야기가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두만의 시선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이 열린 결말의 해답을 찾는 것이다.

범인은 있었지만 잡지 못했다. 두만의 시선은 범인이 누구였는지를 묻기보다는 그 이유를 묻는 시선이다.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인가? 어쩔 수 없는 시대 때문인가? 미국 때문인가?

정답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고 결정할 일이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그것이 그의 현실 인식에 대해 어떤 변화를 주었다면 그것이 무조건 정답이다.

이 쯤에서 지난 글에서 보여줬던 '살인의 추억의 갈등구조' 표를 다시한 번 꺼내보자.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총 갈등구조'라 적힌 빨간색 선은 실제로 형사 내부의 갈등과 범인과의 갈등을 합쳐놓은 영화의 전체적인 갈등구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것뿐만 아니라 방금 해석한 서사 속의 숨은 이야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화가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를 전개했는데도 구성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서사 속에 숨은 이야기는 처음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맞추어 갈등구조를 생각해 본다면 '발단-전개-위기-하강-결말'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숨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인 '정치권력의 반성과 변혁의지도 넘지 못한 민족의 벽', 이것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려 했던 말인 것이다.







포스팅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은 서사에 대한 이해였다. 서사를 완벽하게 이해한 뒤 제대로 된 분석을 하려고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읽는 작업을 수 차례, 그러나 쉽게 결론을 좁힐 수는 없었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의 구조가 정상적인 기준에 맞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 영화와 같은 기준으로 결론을 내기보다는 살인의 추억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보고 그 이유를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이후에 든 생각은 봉준호라는 감독은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사실에 기반을 둔 팩션 영화였기 때문에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범인은 잡히지 않을 것이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면 자칫 흥미를 잃기 쉬운 이야기를 봉준호는 기가막힌 방법으로 극화했다.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면 범인을 알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영화 속에서 오히려 범인을 찾아 낸다. 영화적으로 따지면 현구가 범인인 것이 확실하다. 구속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범인을 잡아놓고도 구속시키지 못해 놓치는 안타까운 상황은 실제 있었던 일을 완전히 위배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뒤엎었다.

영화가 사건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영화가 먼저고 사건이 이후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이 팩션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충분한 깊이와 기교를 바탕으로 영화의 서사적인 내용과 철저히 분리될 수 있도록 영화의 내면에 또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었다.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끼워넣기도 이만하면 능수능란이 아니라 신기에 가깝다.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는 재미를 느끼기 힘들어 관객 대다수는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또한 대중영화 감독의 작품은 너무 얄팍해 깊은 맛이 없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시나리오만으로도 충분한 재미가 전해졌고 충분한 깊이도 있었다. 덕분에 봉준호 감독은 대중과 평론가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을 표현하는데 주로 쓰이는 '다재다능함'은 이처럼 플롯을 자유자재로 다듬고 변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간혹 그도 '마더'처럼 플롯을 다듬는 과정에서 식상해지거나 메시지를 능숙하게 부여하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봉준호라는 영화감독의 역량은 한 두 번의 실수로 무시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직 충무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재능이 지녔고, 아직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감독이다.





[written by colum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