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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리뷰

[영화리뷰]시같은 영화 '시'



 

 


영화 '시'의 처음 시작은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서부터 시작된다. 강가의 갈대밭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카메라는 아이들에서 이동해 도도히 흘러가는 강을 클로즈업한다. 그 때 시야는 마치 강가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 중 한명이 쳐다보는 것 처럼 천천히 확대된다. 그 평화로운 물줄기 위로 한 인영이 떠오른다. 시체다.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는 유려한 글씨 '시' 한 글자가 시체의 머리카락 위로 쓰여진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윤정희 씨가 어떤 연기를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너무나 일상적이고도 섬세한 한 사람의 여자, 할머니, 시인의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 양 같이 깜빡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았다.


 

영화가 흘러가는 구조는 어찌 보면 굉장히 단조롭기까지 했다. 주인공 '미자'가 걸어가는 그리고 보게 되는 장면들. 화면에선 미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은 흐릿하게 표시된다. 하지만 처음 미자가 죽은 희진양의 어머니를 볼 때, 흐릿하게 표시되던 어린아이가 달려가는 모습, 그리고 그 시선이 따라가 희진 양의 어머니를 비출 때 미자와 동시에 관객들은 통곡하는 어머니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 즉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미자의 시야"로 관객들은 이창동의 세계를 지켜보게 된다.


 

주인공 미자는 너무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순수하게 손자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소녀심에 가까운 순수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적어도 시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무 그늘 근처의 할머니에게, 종욱이 친구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일을 나가는 슈퍼집 아줌마에게 종종 무시를 당한다. 그 무시는 대놓고 드러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등장인물들의 미자에 대한 태도에서 어색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느끼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가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자는 자신의 영원한 친구는 "딸" 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야기는 할 수 있는 사이.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사이라고 말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모든 사건들은 미자에게서 딸로 전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종욱이의 사고로 500만원이 필요하다던지, 자신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던지 하는 심각한 사건들에 대해 미자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딸에게 숨긴다.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이 영화 "시" 의 내용이다.


 

영화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순수와 폭력의 세계다. 순수한 폭력과 폭력에 의해 훼손된 순수의 세계. 순수한 폭력에 해당 하는 것은 성욕에 관한 것이다. 미자가 돌봐주는 정상 거동이 불가능한 아저씨, 그리고 희진양을 짓밟은 여섯명의 학생들, 이야기의 시작은 그들의 순수한 성욕 때문에 훼손된 순수의 세계에서 부터 비롯된다. 사실 아이러니 한 것은 성관계 때문에 시작된 문제를 성관계로 풀어나가게 된다는 사실. 손자는 성의 세계에서 가해자였지만 미자는 그 손자를 위해 피해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이 알츠하이머 병이란 것을 알게 되고 먹고 죽을래야 없는 돈을 구해야 하고 성의를 갖고 하던 일을 모독당한 그, 극한의 상황에서 미자의 선택은,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음을 예상하는 관객들의 처참한 마음은.


 

사실 자살을 하기 위해 강가로 떠난 미자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심지어 시조차 쓰지 못하고 비에 흠뻑 젖어 버스를 타게 되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의 손으로 한번의 관계의 문을 열게 될 때의 마음,은. 시를 쓰려고 했던 노트 위로 눈물처럼 흠뻑 젖어드는 빗물과, 아름다운 말을 쓰고자 했던 노트 위로 협박같은 말을 적어내려야 했던 모순은.


 

"사람은 몸이 깨끗해야 해. 그래야 깨끗한 정신이 깃들어." 그렇기 때문에 미자는 그 아저씨와 관계를 가지는 장소를 좁은 욕조로 선택할 것인가. 더러워지는 동시에 물로 씻어버리기 위해. 옷을 벗어내리던 미자의 너무나 하얗고 깨끗한 등이 선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진행 될 동안 모든 일의 원흉인 손자 종욱은 아무것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을 길러주는 할머니를 무시하거나 때로는 짜증까지 낸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손자는 그렇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것을 알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 어떤 기분을 갖고 있는지 아무것도 감독은 보여주지 않는다. 견디지 못한 미자가 한 밤중에 찾아가서 이불을 끌어당길 때도 그것을 덮어버리는 간단한 동작으로 침묵을 고수한다. 그것은 회피일까 무지일까 죄책감의 망각일까.


 

이 영화의 최대의 피해자는 주인공 미자와 죽은 희진이다. 무려 6명의 학생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자살을 선택한 희진은 죽어서조차 자유롭지 않다. 가해자 부모들은 모여서 자신들의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발언들을 하고, 돈으로 무마가 될 것이라 믿으며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만 급급하다. 어린 가해자들은 별다른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평소처럼 오락실에서 장난이나 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수업을 듣는다. 아는 것은 사건이 무사히 종결되기를 바라는 교장과 학생주임 그리고 피해자의 담임 정도 뿐이다. 너무나도 암담하고 답답한 현실의 단면이지만 또 질리도록 현실적이란 것이 불편하다. 하지만 절실하기도 했다. 솔직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가해자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비춰주는 이 영화가.


 

그러나 피해자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 이빨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었던 가해자들은 희진 어머니의 고소에 철퇴를 맞고, 미자는 그 아저씨에게 돈을 받아낸다. 하지만 그 이빨이 너무나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포기해야 했던 그들의 상처가 너무 흉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죠? 도저히 시가 쓰여지지 않아요."


미자는 결국 시를 써낸다. 그리고 사라진다. 미자가 사라진 장소로 지금까지 영화에서 방관자 혹은 외부인이었던 딸이 찾아오고 미자가 시를 쓰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떠돌아다녔던 장소들이 정갈하게 비쳐진다. 한 컷 한 컷 씩. 그리고 미자의 시가 낭송된다.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의 노래임과 동시에 희진의 노래이다. 희진의 세례명은 "아네스", 순결의 상징인 성녀의 이름.

 


아네스는 13살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정혼자들의 구혼을 거절하다 미움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소녀다. 남자들은 그녀를 더럽히기 위해 창녀촌에 보내기도 하지만 아무도 순결한 그녀를 범하지 못했다.


 

희진 아네스.


 

처음에는 미자의 목소리로 들려지던 시는 마지막에는 희진의 목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천진한 희진의 미소가 클로즈업되고 다리를 넘어서 처음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강물은 언제나 죽음과 재생의 상징이다. 과연 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손자를 바라보던 그 시선, 그러나 시낭송 동호회의 한 구석에서 소리 없이 쭈그려 울던 미자가 잊혀지지 않는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written by 권찌쭈]